설명
6월 10일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1987년 6월 10일에 시작된 6.10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범국민적 저항운동으로, 결국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내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실현시킨 역사적 사건입니다[1]. 이 날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어 한국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연 상징적인 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목차
- 6월 10일의 역사적 의미
- 주요 역사적 사건들
- 시간 순 흐름으로 보는 6월 10일
- 역사 속 인물 조명
- 현대적 의미와 교훈
- 참고 도서
- 결론
- 자주 묻는 질문(FAQ)
6월 10일의 역사적 의미
6월 10일은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시작된 날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날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으며, 6월 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400~5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6.10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맞서는 국민적 저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어 6월 10일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역사적 사건들
1987년 6월 10일 - 6.10 국민대회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날 서울에서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주요 대회가 열렸으며, 전국적으로 24만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쇄했지만, 오후 6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도로 위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호응했고, 시민들이 박수를 치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날 서울시내에서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 1987년 6월 10일 6.10 국민대회 모습 (성공회대성당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민주화 시위,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범국민적 저항)
명동성당 농성과 전국 확산
6.10 국민대회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명동성당 농성이었습니다. 6월 10일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했습니다. 이는 애초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6.10 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 농성을 거치며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6월 15일경부터는 부산, 대전, 진주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고, 6월 20일부터는 대규모 시위가 광주, 전주, 순천, 익산 등 호남 지방으로 옮겨졌습니다.
시간 순 흐름으로 보는 6월 10일
타임라인: 6.10 민주항쟁 전개 과정
-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 민주화 열기 고조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4.13 호헌조치 발표 → 개헌 논의 차단
- 19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 범야권 연대 구축
-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 민주화 열기 절정
- 1987년 6월 10일: 6.10 국민대회 개최 → 전국 22개 도시 24만 명 참여
- 1987년 6월 10-15일: 명동성당 농성 → 지속적 저항의 상징
- 1987년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 → 전국 150만 명 참여
- 1987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 전국 37개 도시 130만 명 참여
-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선언 → 직선제 개헌 수용
이러한 시간적 흐름을 통해 볼 때, 6월 10일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을 만든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 인물 조명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지도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1987년 5월 27일 기독교회관에서 결성된 범야권 연대기구였습니다. 국본 발기인들은 지역대표 352명, 종교계 대표 683명, 정치인 213명, 각계 대표 943명 등 총 2,191명을 대표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월 10일 성공회대성당에는 당국의 가택연금을 피해 계훈제, 박형규, 지선 스님, 진관 스님, 유시춘, 제정구, 오충일, 금영균, 김명윤, 양순직 등 20여 명의 국본 간부들이 미리 들어가 역사적인 6.10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이한열과 6월 항쟁의 도화선
6.10 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고, 이러한 분노 속에서 6.10 국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이한열의 피격 사건은 6월 항쟁을 더욱 뜨겁게 타오르게 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그는 7월 5일 사망하여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직후 모습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동료 학생이 부축하는 장면)
현대적 의미와 교훈
시민 참여 민주주의의 모범
6.10 민주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부대"로 불린 직장인들과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였습니다. 6월 12일 명동 일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거리로 나온 회사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주변 상인과 시민들은 빵, 물, 약품, 의복 등을 전달하며 적극적인 호응을 보냈습니다.
평화적 저항의 힘
6월 민주항쟁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독재정권을 굴복시킨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가 파괴되는 등의 사건이 있었지만[8], 전체적으로는 평화적 방식으로 저항하여 결국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2024년 기념행사의 의미
2024년 6월 10일에는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37주년 기념식이 서울시청에서 열렸습니다[2].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 300명이 참석하여 6.10 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 1987년 6월 명동성당 농성 모습 (학생들과 시민들이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이는 장면, 지속적 저항의 상징)
참고 도서
- 『6월 항쟁과 한국 민주주의』 - 정해구 저, 민음사
- 『1987년 6월 항쟁 연구』 - 한국정치학회 편, 나남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자료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국 현대정치사』 -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 『87년 체제론』 - 최장집 저, 창작과비평사
참고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월항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6.10항쟁
- 우리역사넷: 1987년 6월 항쟁
결론
6월 10일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범국민적 저항운동으로, 400~5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습니다.
6월 10일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에도 계승되어야 할 민주주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평화적 저항을 통해 독재를 종식시킨 6.10 민주항쟁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앞으로도 6월 10일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교훈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Q1: 6.10 민주항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A: 6.10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어 24만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Q2: 6월 민주항쟁의 성과는 무엇인가요?
A: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내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실현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본격적인 민주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Q3: 명동성당 농성은 왜 중요한가요?
A: 명동성당 농성은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5일간 지속되어 6.10 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Q4: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요?
A: 6월 민주항쟁에는 전체적으로 400~500만 명의 연인원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에는 150만 명,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130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Q5: 현재 6월 10일은 어떻게 기념되고 있나요?
A: 매년 6월 10일에는 6.10 민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2024년에는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37주년 기념식이 서울시청에서 개최되어 정관계 인사 300명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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