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6월 9일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된 날입니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열사가 민주화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직격당해 쓰러진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국민적 저항을 폭발시켰고, 결국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내어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차
- 6월 9일의 역사적 의미
- 주요 역사적 사건들
- 시간 순 흐름으로 보는 6월 9일
- 역사 속 인물 조명
- 현대적 의미와 교훈
- 참고 도서
- 결론
- 자주 묻는 질문(FAQ)
6월 9일의 역사적 의미
6월 9일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7년 이 날에 발생한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전 국민을 민주화 투쟁으로 이끈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맞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6.10 국민대회)'를 계획했고, 이한열은 이 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주요 역사적 사건들
1987년 6월 9일 -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이한열(1966년 8월 29일~1987년 7월 5일)이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이 촬영한 피격 직후 사진은 전 세계에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한열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순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을 이종창이 부축하는 역사적 순간)
6월 민주항쟁의 전개 과정
이한열의 피격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습니다. 6월 10일 6.10 국민대회가 열렸고, 이후 약 20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졌습니다.
특히 6월 10일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이후 5일 동안 농성을 계속한 것은 6.10 국민대회가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간 순 흐름으로 보는 6월 9일
타임라인: 6월 9일을 중심으로 한 6월 민주항쟁 전개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4.13 호헌조치 발표 → 개헌 논의 차단
-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 공개 → 국민 분노 폭발
- 19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조직 → 범야권 연대 구축
-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 6월 민주항쟁 도화선
- 1987년 6월 10일: 6.10 국민대회 개최 → 전국 24만 명 참여
- 1987년 6월 18일: 최루탄추방대회 → 전국 100만 명 이상 참여
- 1987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 전국 37개 도시 100만 명 참여
-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선언 → 직선제 개헌 수용
- 1987년 7월 5일: 이한열 사망 →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추모
- 1987년 7월 9일: 이한열 민주국민장 → 160만 명 추모 인파
역사 속 인물 조명
이한열(李韓烈, 1966-1987)
이한열은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부친 이병섭과 모친 배은심의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광주진흥고등학교를 거쳐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던 이한열은 연세대학교에서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는 "최루탄 연기로 가득찬 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어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집니다.
정태원 사진기자
정태원(1939년생) 로이터통신 사진기자는 1987년 6월 9일 이한열 피격 현장을 촬영하여 전 세계에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알린 인물입니다[9]. 그가 촬영한 사진은 중앙일보 1면과 뉴욕타임스에 실려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정태원은 "대한민국 역사를 바꿀 기폭제가 될 줄은 몰랐다"고 회고하며, 이한열이 "도망가다가 뒤통수에 맞았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 1987년 6월 9일 정태원 기자의 역사적 사진 촬영 순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가 이한열 피격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모습, 역사를 바꾼 한 장의 사진)
현대적 의미와 교훈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시민 참여
6월 9일 이한열 피격 사건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6월 민주항쟁에는 400~500만 명의 연인원이 참가했으며, 이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부대"로 불린 직장인들과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언론의 역할과 기록의 중요성
정태원 기자의 사진처럼 언론의 기록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현재도 이한열기념관에서는 당시 사진들을 전시하여 6월 민주항쟁의 의미를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평화적 저항의 힘
6월 민주항쟁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독재정권을 굴복시킨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경찰이 총 67만 발이 넘는 최루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평화적 방식으로 저항하여 결국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 1987년 6월 명동성당 농성 모습 (학생들과 시민들이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이는 장면, 비폭력 저항의 상징)
참고 도서
- 『6월 항쟁과 한국 민주주의』 - 정해구 저, 민음사
- 『이한열, 유월하늘의 함성이여』 - 이한열 추모사업회 편
- 『한국 현대사 60년』 - 서중석 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월항쟁을 기록하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편
- 『한열, 그대 고운 이름이여』 - 이한열 필사 유고집
참고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6월항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한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결론
6월 9일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전 국민을 민주화 투쟁으로 이끈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6월 9일의 역사적 의미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하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통해 지켜나가야 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이한열 열사가 꿈꾸었던 "최루탄 연기로 가득찬 저 하늘"이 아닌 자유롭고 민주적인 하늘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앞으로도 6월 9일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교훈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Q1: 이한열은 언제 어떻게 최루탄에 피격되었나요?
A: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경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시위 중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Q2: 이한열 피격 사건이 6월 민주항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A: 이한열 피격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확산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Q3: 6월 민주항쟁의 성과는 무엇인가요?
A: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내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실현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본격적인 민주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Q4: 이한열은 언제 사망했나요?
A: 이한열은 최루탄에 피격된 후 혼수상태에 빠져 한 달간 사경을 헤매다가 1987년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Q5: 현재 이한열을 기리는 시설은 어디에 있나요?
A: 2005년 6월 9일 서울 신촌에 이한열기념관이 개관되었으며, 2016년 6월 9일에는 연세대학교 정문에 추모 동판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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